롬 7:1-13
법 망을 교묘히 피하는 죄성
예전에 소중한사람들 건물을 건축할 때의 일입니다. 공사 후반부에 들어 시공사와 대화하면서 약간씩 어긋남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좋게 해주려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설계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시공사는 얼마든지 현장에서는 고치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설계는 공사가 시작되기 전 계약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데 중간에 바뀐 부분 중에는 상당히 많이 누락된 것이 있었습니다. 바뀌게 되면 회의가 있어야 하는데 공사 초반 굵직한 부분들이 바뀔 때에 논의조차 없었습니다.
건축 분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공사를 끝내려면 결국 서로 타협해야만 하기 때문에 저는 법적 조문을 얻기 위하여 계약서를 들고 변호사를 찾아갔었습니다. 변호사가 읽어 보며 한 말이 무척 화가 났습니다. 해석하기에 따라 다른 부분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법적 분쟁으로 가야한다는 말이었는데, 당연하게 보이는 것이 글로 들어가니 당연하지 않아지는 마법이 펼쳐지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법은 최후의 보루이고 먼저는 서로 잘하려 해야 한다는 변호사님의 조언을 따라 시공사와 서로 최대한 타결하기로 힘을 썼었습니다.
율법이 가진 유익과 사실은 더 중요한 우리 마음에 대한 문제를 본문에서 나누겠습니다.
율법의 가면 뒤에 가려진 죄악의 본성
바울은 율법의 가면 뒤에 가려진 우리 죄악의 본 모습을 이 본문에서 드러냅니다. 제가 말하는 ‘율법의 가면’이라는 말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자기 위안을 말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 7:5
여기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라 한 것은 예수를 믿기 전 부패한 본성의 상태에서는 율법을 역이용하여 죄의 정욕에 사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당위성을 스스로 얻는 것입니다. 당위성을 율법에 대하여 자기가 원하는 뜻을 따라 해석하여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사울의 경우에 치명적인 죄를 범하였으니 이것이 스스로 당위성을 얻어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말렉을 진멸하라” 하였습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삼상 15:3
여기 진멸하라는 “헤렘(חָרַם(charam:strong # 2763))”은 모든 것을 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구절에서 사무엘은 모든 생물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말렉의 모든 것을 죽이지 않았으니 이유는 사울이 만든 율법의 허용 범위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 얻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21
사탄이 인간을 넘어뜨리는 방법은 율법의 선을 살짝 넘나들며 해석의 여유를 보여주며 결국 말씀을 어기게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보아도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약간 다르게 바라보게 됨으로 결국 죄에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3
하와의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에 대한 틀린 부분을 사탄은 놓이지 않고 파고 들었습니다.
“죽지 아니하리라.”
하와가 선악과를 만진다고 죽은 것은 아닙니다. 사탄의 말에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하와의 생각의 가장 큰 틈은 “죽을까 하노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입니다. 죽을 수도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허용의 선은 하와로 하여금 당위성을 갖게 합니다. 먹어도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마음입니다.
사울 왕도, 아담과 하와도 결국 죄가 가져온 열매인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악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칭의를 얻게 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음식 먹는 것, 절기를 지키는 것, 할례를 받는 것과 같은 율법을 행하는 것을 넘어서서 구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의 가면 뒤에 숨지 말라는 의미로 부부간에 법적인 갈라짐을 롬 7:1-5절에서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결코 율법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조항은 무엇이 죄인지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신자는 성령의 법을 쫓아야만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좋은 마음으로 건축하려고 하는 시공사와 건축주의 마음이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거룩을 이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따라서(결국은 율법의 가면 뒤에 숨게 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 7:6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것이라며” 바울이 꾸짖듯이 말하는 것은 율법이 잘 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이 율법의 뒤에 숨어서 더 정욕을 자극하여 결국 사망하게 하는 그 거짓됨을 꾸짖는 것입니다.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롬 7:7-8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기준점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율법을 맡은 사람들에 대하여 계속 부딪히게 되는 것은 그들의 외식함 때문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잘 준수하는 듯 보이지만 속은 도둑이며 음행자들이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7-28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예수를 시험하려 하여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예수께 데려 왔을 때에 저들의 율법의 가면 뒤에 숨겨진 죄의 더러움을 직시하십니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아무도 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내면 상태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선을 타고 외식함 속에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는 인간의 악함을 한탄합니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1-12
성령을 따른다는 것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6절에 나온 ‘영의 새로운 것’을 따라야 합니다. 성령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른 다는 이 본문의 설명을 잘 못 이해하여 글로 적힌 것은 성령의 것이 아니라며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단으로 정죄된 한 교회의 목사는 설교 원고를 읽으며 설교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설교하기도 합니다.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는 말은 모든 즉흥성이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과 같이 ‘나’라는 존재는 육체, 마음, 의식 이 모든 것의 전인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우리 의식의 뼈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이 즉흥적인 자기의식의 흐름만 따르려 하는 자는 결국 자기 마음대로 말씀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감싸는 근육에 해당하는 것은 교리입니다. 교단마다 약간의 교리가 다를 수 있으나, 복음주의적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뼈대를 근육이 바쳐서 힘을 얻게 되듯, 바른 교리의 해석의 틀을 통해 말씀을 바라봄으로 드디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살을 붙여야 하니 이것을 선한 양심이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딤전 1:5
성령님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뒤엎지 않으십니다. 결국 시공사와 건축주가 선한 양심으로 일한다면 계약서가 별로 쓸모가 없는 것처럼, 약속의 말씀을 바라 보게 하는 교리를 받게 되는 양심이 옳아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목적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방향을 잃은 사람을 바울은 선한 양심을 잃어버린 자라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 1:6-7
성령의 조명(깨닫게 하심)은 하나님 말씀을 선한 양심을 가지고 바른 교리를 통해서 바라 볼 때에 우리 영혼에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르는 당신의 삶은 거짓됨이 없는 생명의 열매가 가득할 것을 기대합니다.
◎ 묵상을 돕는 질문
1. 은혜로 의를 얻어 구원에 이른 것은 또한 우리가 죄의 올무에서 해방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거룩에 이르는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거룩에 이르기 위해서는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가야 합니다. 성령을 따르는 것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바른 교리를 통해서 말씀을 봄으로 우리 영혼에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2. 당신 삶은 혹 주일 성수, 주정 헌금 생활 했다는 것으로 거룩에 이르렀다 안위를 삼지 않는가요? 내면에서 변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3. 말씀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여 결국 죄에 넘어진 적이 있습니까?
성경 본문 및 주해
롬 7:1-13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묵상을 돕는 주해
1.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로마 교회는 유대 기독교인과 헬라 기독교인이 함께 하였다. 유대 기독교인은 본래 율법을 아는 자들이고, 헬라 기독교인도 회당에서 율법을 배웠다. 여기서 말하는 법(ὁ νόμος, ho nomos)은 일반적인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ὁ νόμος의 사용 사례: 롬 1:13, 8:12, 10:1, 11:23, 12:1, 15:14, 15:30, 16:17) 도덕법 (Glöckler) 도 아니다. (Meyer's NT Commentary)
2 남편 있는 여인 : 사도 바울은 남편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남편이 율법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남편이 죽었다는 말은 율법이 그리스도인에게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다. (Ellicott's Commentary for English Readers) (롬 7:4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