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7:14-25
은혜로만 갈 수 있는 거룩의 길
과연 우리는 말씀을 읽으며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거룩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예전에 아마존에서 선교하시던 선교사님 부부와 대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여 선교사님이 확신에 차서 말하십니다.
“목사님 저는 개인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따라서 살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자리가 갑자기 얼음 상태가 되었습니다. 남편 선교사님이 수습에 나섰습니다.
“이 사람이 밀림지역에서 계속 있으면서 혼자 성경을 보다 보니 이렇게 잘못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질문이 됩니다.
바울은 은혜의 사람들은 거룩의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했으며 또한 주님이 오실 때에 거룩하고 흠이 없이 서길 바란다고 축언 기도했습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데..
그런데 바울은 7장을 마무리하면서 거룩을 향하여 나아갈 능력이 자신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거룩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말을 다 뒤집듯 말입니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18-19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설명하길, 율법이 말씀하신 예를 들어 시기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싶지만 본인의 죄성으로 인하여 하고 싶은 하나님의 법을 따를 수 없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1
바울이 말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죄의 본성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열심히 종교적으로 했던 것들이 있으니 악한 본성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제자 훈련도 받았고, 전도폭발 훈련도 받았습니다. 그래도 악한 본성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예전에 한 청년에게 제자 훈련좀 받으라고 심방한 때였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훈련 받아도 우리 언니의 모습은 하나도 변한게 없더라고요.”
우리의 죄성은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는 것입니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2-23
여기서 ‘법’이라는 것은 율법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율법은 변하지 않는 규정인 것과 같이 죄도 변하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거룩을 향하여 나아갈 가능성 자체를 차단시켜 버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로마서는 16장까지 이어가야 합니다.
거룩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여기서 바울은 거룩을 향해서 나아갈 소망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또한 익히 들어 아는 말씀입니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4-25
내가 거룩에 도달할 수는 없으나 예수께서 도달할 수 있게 하시리라!!
예수는 우리의 구원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을 바랄 수 없는 가운데에서도 믿어 의에 이르듯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인 누구라도 예수의 구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법적 용어로 “칭의(Justification)”라 합니다. 죄인은 더 이상 죄가 없다고 선언된 것입니다.
또한 거룩을 향하여 나아갈 길도 예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의로움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예수 밖에 없다는 말은 예수께 간구하라는 말입니다.
거룩을 향하여 몸부림치는 신자에게는 죄와의 갈등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에게는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호소하십니다.
“아무개야, 그래서는 안된다!”
존 오웬 목사님은 이것을 죄를 혐오하는 단계라 말씀하십니다. 죄가 미워야 합니다.
쥐를 혐오하듯 죄를 혐오하라
죄를 좋아하여 죄를 지어도 되는 이유를 찾아 당위성을 얻는 것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 혐오하고 미워하는 죄성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예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불치병을 고쳐주세요 하고 간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내가 시기 하지 않게 해 주세요.”
“아버지, 음란하지 않게 해 주세요.”
“너무 미운 제 남편을 사랑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간구하면 우리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하실 것입니다. (요일서 1:9)제자훈련을 했기 때문에 죄를 안 짓게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 속에서 우리가 말씀, 암송, 기도, 교리와 같은 모든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향해 더 잘 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을 쓰신 손동희 권사님의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를 볼 때에 제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린 손동희 권사님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공산당에게 잡혀가기 전 날 손양원 목사님이 두려워 밤새 떨었다는 장면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 자체인 대단한 분이라 저의 마음에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분이 밤새 떨며 기도하셨다는 것은 신앙을 지킨 것은 예수께서 지키게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두려웠습니다.
“신앙을 지키게 해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 간구를 들어 주셨기 때문에 다음 날 당당히 공산당에게 잡혀가신 것입니다.
이제 제 안에 의를 향한 소망이 없다는 것이 소망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만이 나의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주세요.”
목사님도 하나님이 밉습니다.
어제 (2023년 6월 7일) 저와 새로남교회에서 함께 동역했던 목사님의 아들 장례식을 다녀왔습니다. 키도 크시고 점잖은 모습을 하신 목사님입니다. 항상 웃으시고 인격도 좋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 뵌 목사님은 겨우 빈객들을 맞이할 정도였습니다. 사모님은 여러 번 쓰러지신 듯합니다.
아들은 이제 19살 고3이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베트남에서 목회자 포럼에 참석중이었는데 청천벽력같은 그리고 거짓말이라 느끼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아드님이 소천하셨습니다.”
장례식장 식당에서 다른 목사님과 얘기 하는데 그 목사님이 저쪽 빈소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들렸습니다.
“보이스 피싱인줄 알았다........ 자전거 타고 가다가 차에 치였다니 누가 믿겠는가?”
저는 6월 7일 점심 시간에 핸드폰을 보다가 이 사실을 알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온 것입니다. 저도 아들을 둔 아빠로써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마음에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암환우를 돌보다 보니 장례식장을 자주 다니는 편입니다. 그러나 제 인생에서 가장 발을 떼어 계단오리기 조차 힘든 장례였습니다.
‘과연 나라면 이 장례식에서 무슨 설교를 할 터인가?’
대구 CBS 이사장인 장창수 목사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셨는데, 그 말씀을 들으며 저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설교 제목이 “부활의 노래”인데 이것은 이동원 목사님의 책에서 인용한 제목이었습니다. 이동원 목사님도 40세인 아들이 먼저 소천했다는 것을 그곳에서 알았습니다.
장창수 목사님은 아침에 전화를 받았다고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무개 목사님의 첫 말은 목사님, 하나님이 밉습니다.... 였습니다.”
머리로는 부활, 생명, 믿음, 구원 갖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그 가치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잔인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밉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기에 밉다는 말이겠지요.”
이동원 목사님은 아들을 먼저 보낸 뒤 처음 맞은 부활절에 이렇게 설교하셨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 찬양이 더욱 마음에서 사무쳐 부르게 됩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살았다. 살았다. 내 아들 다시 살아난다.”
아무개 목사님은 제가 떠나 나오며 안아 드릴 때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목사님, 이런 일에 은사가 있으시니 저를 위해서 꼭 기도해 주세요.”
저에게 무슨 은사가 있다는 말일까요?
죽음의 공포, 삶에서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암과 투병의 시간... 많은 가족들의 슬픔...을 봐온 것이 은사일까요?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아무개 목사님이 다시 강한 믿음을 갖고 서게 되는 것도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하여 아무개 목사님도 이동원 목사님처럼 많은 성도들의 괴로운 삶에 힘을 실어줄 참 목자가 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를 약속합니다. 꼭 목사님께서 강한 믿음으로 세워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의로울 소망이 없는 것이 오히려 소망입니다. 예수님만이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 묵상을 돕는 질문
1. 거룩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이 쉽지 않아서 포기한 거룩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2. 누군가를 위하여 중보한다는 것은 예수께 소망을 둔 일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중보해 주시는 분의 변화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성경본문 및 주해
롬 7:14-25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묵상을 돕는 주해
16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 원하지 않는 것은 죄를 말한다. 그러나 결국 죄의 본성을 따르게 됨으로 율법이 선한 것을 더 드러낸다. 마치 불법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Ellicott's Commentary for English Readers)
17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나라는 자체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의 본성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되었다. 자신의 원함이 선인데 그것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Barnes' Notes on the Bible)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 바울이 깨달은 법으로써 선을 행하고나 하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인간의 상태이다.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 : 죄와 악의 영향이 너무 커서 하나님의 법에 저항하는 상태이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 여기서의 구원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이룸을 말하는 것이다. (Ellicott's Commentary for English Read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