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

애가 5:11-22 애가를 마치며 - 매일성경, 큐티 / 자녀의 회복, 믿음의 여정

사랑합니다예수님 2024. 10. 29. 08:14

애 5:11-22

애가를 마치며

 

그 고통을 공감할 수 없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한 번은 꿈속에서 총에 맞아 죽는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그 순간의 감각이 얼마나 생생했던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총알이 심장에 박히는 순간, 아, 이게 끝이구나 싶었습니다. 심장이 멎어가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지며 아, 이렇게 죽는 거구나—하고 실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꿈일 뿐입니다. 진짜 그런 순간이 어떤 느낌일지는 결국 죽어보기 전엔 알 수 없습니다.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요?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다리가 풀려 더는 걸을 수 없을까요? 만약 나라가 멸망한다면, 그건 또 어떤 절망일까요? 사랑하는 자식을 잃는다면, 그 고통은 얼마나 깊을까요?

이야기를 제 꿈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고통의 깊이는 겪어보지 않은 이상 꿈속의 신기루처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슬픔과 환우들의 고통

예레미야 애가를 강해하며 암 환자들의 고통과 예레미야의 슬픔을 연결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로서 분명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환우들을 위해 매일 눈물로 기도해도, 환우들이 겪는 슬픔과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나라의 멸망을 목도하며 느꼈던 감정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다는 절망이었습니다. 저 역시 제 삶의 어떤 순간들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신 듯한 깊은 상실감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맡은 교회가 늘 어려울 때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듣지 않으실 수 있을까 하는 원망과 분노가 밀려왔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지난 30년 동안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신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때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반복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오해하며 마음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서 5장 8절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있음을 알게 되었고, 다시 힘을 내어 삶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고통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여백조차 없는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제 삶에선 하나님께서 시간마다 도와주신다는 작은 희망들이 남아 있었지만, 예레미야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하나님이 완전히 등을 돌리신 듯한 그 고통이 예레미야를 짓눌렀던 것입니다.

 

전쟁의 비극과 에레미야의 절망

애 5:11 “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전쟁이 터지면 가장 먼저 고통을 겪는 것은 늘 약한 이들입니다. 부녀자와 어린 소녀들이 그 비극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의 일이라 그런지 우리가 그 고통을 이 한 절에서는 공감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일어나는 성폭행 상황을 보면 조금 느낌을 올지 모릅니다. 인권 단체와 국제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 아동, 노인까지도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피해자의 연령은 겨우 4세에서 8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성폭행은 본질적으로 피해자가 침묵하기 쉽고,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알려진 사례들은 아마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만큼 사건들은 더 끔찍하고 잔인했으리라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고대 예루살렘의 부녀자들이 대적에게 유린당하는 현실을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것은 단순한 패배를 넘어, 하나님의 버리심이라고 그는 절망했습니다.

 

슬픔의 성문앞

한때 노래와 웃음이 넘치던 성문 앞의 광경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슬픔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애 5:14-15 “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사람들의 이야기와 노랫소리가 가득했던 공간에 이제는 텅 빈 고요만 남아 있다면, 그 상실감은 얼마나 클까요? 아마도 우리는 그런 극단적인 순간을 견디기 힘들하는지 모릅니다. 기쁨이 사라진 자리에는 깊은 절망만이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사역하셨던 한 목사님께서는 아드님이 고3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이 떠난 후에도 목사님은 아들이 입던 옷과 즐겨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을 여전히 아들의 방에 두고 가끔 그 방을 찾아가 홀로 눈물을 흘리곤 하셨습니다. 지난 번 제가 호스피스 사역을 하기에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저를 그 방에 초대해 주셨었습니다. 그 방에 들어서자 금새 목사님은 눈시울이 붉어 졌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느끼는 그 깊은 슬픔과 그리움을 제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단지 소년의 흔적들, 작은 장난감과 예쁜 소품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무너진 성문에 홀로 앉아 느꼈던 그 공허함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 슬픔은 그 자리에 앉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통입니다.

 

전쟁은 수없이 많은 아들들을 앗아갑니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만도 약 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백만 개의 가정이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그들이 남긴 빈 공간을 마주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숫자로 말해본다 한들, 우리는 그 부모들의 슬픔을 정말로 느낄 수 있을까요?

 

예레미야의 탄식과 회개의 요청

제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설교하기 어려운 본문은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예레미야가 토해낸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그 한마디의 절망을 아무리 전해도, 성도들이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애가에서 말하는 결론은 단순합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애 5:21-22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이렇게 슬프니, 주님께 돌아가자”는 것이 예레미야의 메시지입니다. 그의 외침은 단순한 회개가 아니라, 절망 끝에서 비로소 터져 나오는 간절한 회개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로마가 멸망하던 때에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예레미야애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제국이 무너져가는 참혹한 순간 속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단 하나였습니다. “주여, 우리가 주께 돌아가나이다.”

예레미야의 애가는 이처럼, 세상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끝나버린 자리에서 비로소 터져 나오는 부르짖음입니다. 회복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없다는, 마지막 남은 희망의 고백입니다. 하지만 그 깊은 슬픔을 함께 느끼지 못한다면,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버리심이라는 말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으로 느끼기엔 너무도 무거운 감정입니다. 성문 앞에 앉아 모든 것을 잃은 자의 고독, 그리고 그 고독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회개는 고난을 겪은 자만이 깨닫는 신앙의 깊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경고

우리가 지금 동성연애에 대해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지,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멈출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될지, 그리고 이 나라의 학교들이 우리 딸들에게 "남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날이 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지 모른다는 경고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경고해도 듣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백성과 닮아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경고의 소리에 귀를 막은 채 자신들의 길로만 나아가던 그들처럼, 오늘날 우리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지는 않은지 두렵습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우리가 이 길을 계속 가다가는 우리와 우리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버림받는 날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의 딸들이 유린당하고, 심지어 우리의 아들들조차 군인들의 손에 짓밟히는 참혹한 일이 벌어질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기를 소망합니다. 참된 회개가 우리 안에서 시작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기를. 이 길을 멈추고 주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회복과 은혜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슬픔 속에서의 회복과 회개

예레미야의 탄식은 단순한 슬픔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망의 끝자락에서 터져 나오는 간절함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시대의 혼란과 도덕적 헤이 함 속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채 나아가는 이 길이 어디로 향할지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다시 은혜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레미야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탄식 속에는 단순한 절망이 아닌, 주님께로 돌이킬 때 새로워질 수 있다는 소망의 외침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희망마저 사라진 자리에서조차,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가 5:21).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자비를 구하며 회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의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회복과 은혜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그분께로 돌이킬 때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회개하며 나아갈 때, 다시금 새롭게 될 길이 열릴 것입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은 삶에서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을 마주했을 때,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분이 여전히 당신과 함께 계시다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나요?

 

2. 지금 당신은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회개하며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나요? 회복의 길이 열리도록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걸음은 무엇인가요?


애 5:11-22

11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12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13청년들이 맷돌을 지며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14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15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16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17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18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

19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20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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