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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39-53 기도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들 - 매일성경, 큐티 / 영적 무기력, 기도의 힘

사랑합니다예수님 2025. 4. 16. 06:53

눅 22:39-53

기도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있습니까?

가족끼리 "요즘 어때?" 하고 안부를 묻습니다. 하지만 진짜 힘든 이야기는 쉽게 꺼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친한 친구에게는 마음을 털어놓기 쉬운데, 가족에게는 괜히 말했다가 걱정을 끼치거나 잔소리를 들을까 봐 망설이게 됩니다.

가족은 서로 너무 잘 알고 마음이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감정이 더 크게 반응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나 요즘 많이 힘들어”라고 말하면,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위로해 주지 못하고 속상해하며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왜 힘든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며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죠. 그런 반응이 부담스러워서, 결국엔 가족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가족에게 진심 어린 기도 제목까지 나눈다는 건, 어쩌면 언감생심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동료들 사이에서도 진심 어린 기도 제목을 나누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곧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중한 사람들 힐링센터에서는 서로의 병이 낫기를 위해 기도하고, 연약함을 나누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습니다. 서로를 신뢰하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곁에는 당신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고통 속의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은 감람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이제 곧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그 위태로운 시간이 다가올 때 예수님은 기도로 그 시간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이시지만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 앞에서 느끼신 두려움과 괴로움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죽음과 고통을, 예수님도 피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둔 그 상황이 예수님께 얼마나 큰 부담과 고통이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 바로 이것입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눅 22:44)

 

이 구절은 과장이 아닙니다. 우리가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장에 탈이 나고, 몸에 이상이 오듯이, 예수님께서도 그 극심한 갈등과 압박을 온몸으로 겪으신 것입니다. 그 갈등은 인간으로서 죽고 싶지 않은 본능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길 사이에서 오는 깊은 내면의 충돌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신적인 존재로 고난을 담담히 받아들이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인간으로서 그 누구보다 깊이 두려워하시고 괴로워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너무 당연하게 말하곤 합니다.

“예수님은 원래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지셔야 하잖아요. 그게 약속된 거니까요.”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자신의 손을 불 속에 그냥 넣을 수 있습니까? 절대 못합니다. 그건 우리의 본능이 막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뇌가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건 위험해, 고통스러워, 피해야 해!’라고 뇌가 경고하며 행동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인간 본능을 직면하고 있기에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뇌를 조금이 나마 옅 볼 수 있는 시편의 한 구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시 55:1-5)

 

기도가 잘 안되는 이유

이 고통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로써 나누십니다.

저도 우리 환우들의 소그룹 모임을 준비하면서 리더 분들과 “요즘 어떠세요?” 하고 안부를 묻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 삶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거나, 마음 깊은 곳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일은 잘 없습니다. 왠지 모르게 조심스럽고, 또 그렇게까지 속마음을 꺼내는 데 망설임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목사라는 자리 때문에, 성도들 앞에서는 늘 흔들림 없이 밝은 모습을 기대할 거라는 부담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음 깊은 곳엔 말 못할 아픔이 있고,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그 무거운 마음의 짐을 제자들과 나누셨습니다. 그저 “나를 위해 기도하라”는 간단한 부탁 정도가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깊은 슬픔과 고통을 기도제목으로 나누신 것입니다.

이 점을 누가복음은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의사였던 누가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제자들이 슬픔으로 인하여 잠들었다(NIV. exhausted from sorrow)”(눅 22:45).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슬픔이 그만큼 깊이 제자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내면에서 흐르는 고통이 그대로 제자들의 심령에 닿았고,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제자들은 결국 깊은 잠에 빠졌던 것입니다.

저도 심각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데 한심스럽게도 잠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더 피곤하고 괴로울 수밖에 없는데 깨어 기도하시고 제자들이나 저는 몸의 피곤을 이겨내지 못할까요?

 

사람은 견디기 힘든 상황을 만나면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일종의 ‘셧다운’을 시도합니다. 너무 큰 고통이나 스트레스가 몰려올 때 뇌는 버티는 대신 무기력 상태로 빠지게 만듭니다. 이건 단순한 나약함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사람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의 죽음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을 때, 그 슬픔을 오랫동안 품고 있으면 우리의 몸은 점점 병들기 시작합니다.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우리 몸 안에서는 이상 반응이 나타납니다. 마치 내 안의 공장들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면역체계는 무너지기 시작하고, 염증이 생기며, 피부에 고름이 터지거나 몸 여기저기에 종기가 나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러한 스트레스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몸속 깊은 곳에서 종양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암이 되는 것입니다(크리스 워크, 당신의 몸은 암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몸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방어 기제를 작동시킵니다. 고통을 직면하는 대신 감정을 닫아버리고, 감각을 줄이며, 무기력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습니다. 마치 더는 감당하지 못하니 그냥 멈추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기력하게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고난으로 인하여 무기력의 늪에 빠져 들어가는 우리 마음을 뚫고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까?

예수님은 자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 22:46).

 

닥쳐온 고난으로 인해 제자들처럼 우리도 영적인 무기력에 빠져 기도하지 못했다고 해 봅시다. 당신은 고난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주님을 섬겼고, 얼마나 많은 헌금을 드렸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열심히 했다고 해서 평안한 삶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끊임없이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인간이기에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이 올 것을 미리 아시고, 그 상황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기도입니다. 마치 암 환자가 자신의 병을 알고 있다면, “암에 걸리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듯이, 누구라도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를 보여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걸어가도록 하신 거죠. 만약 우리가 앞으로 어떤 고통 있을지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기도하는 중에 땀이 핏방울처럼 변할 정도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하셨지만, 결국 상황은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당신의 귀에 거슬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란 말인가요? 전쟁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이 하나님 뜻입니까? 전염병으로 좌우 분간도 못하는 어린아이까지 죽은 것이 하나님 뜻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이 말씀이 주어진 배경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예루살렘과 유다는 바벨론에게 무너져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 뜻은 너희가 이해하는 방식과 다르다.”

 

이 말씀이 너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지요. “왜요, 하나님? 왜 우리가 잡혀가야 합니까? 회개하게 하시면 되잖아요.”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죄악과 패역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죄악이 어느 한계를 넘어섰을 때, 결국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닥쳐온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욥을 생각해 봅시다.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정말 내가 이렇게까지 고난을 받아야 할 만큼 큰 잘못을 한 걸까요?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데요. 하나님이 법정에 나오셔서 제 얘기를 한번 들어보시죠. 정말 이 고난이 정당한 형벌인지 따져보고 싶습니다”(욥 9:32-35, 10:8-9, 13:23-24).

욥은 자기 죄가 있다면 받아야 한다는 것까지는 인정합니다(욥 6:24, 13:23-24). 하지만 이렇게 극심한 고통이 자신이 지은 죄의 형벌로서 정당한 수준인지, 그 형량이 정말 이 정도나 되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 해도, 정말 쓸개가 터지고 장이 찢어질 정도의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나오지 않습니다. 무려 38장까지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38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같을 수 없습니다. 그 수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앞의 일만 보지만,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아우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인간이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네가 너의 날 동안에 아침에게 명령한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준 적이 있느냐"(욥 38:12).

 

아침이 되어야 하니 “해 떠라, 해 떠라” 한다고 해서 해가 뜨나요? 인간이 어떻게 해를 뜨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도 없고 해가 뜨는 위치를 일러준 적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질서대로 우주는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

“내가 주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기에 우리가 그 고통스러움을 견디려면 기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적 무기력함을 이기는 방법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님들이 고통이 다가올 때 오히려 그 시험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옆에서 기도의 자리에 있으시길 간절히 바라는데 심지어 주일 예배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커녕 예배조차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지치고 무기력해졌다는 뜻이겠지요.

무기력함은 사실 우리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반응이라 말씀드렸지만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그 무기력을 이겨내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조차 하기 힘들고 마음이 지쳐 있을 때,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지금 저는 너무 약합니다. 시험에 빠질 것 같고, 견딜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힘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그 밤에 잠이 들었지만, 예수님은 기도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더 큰 고통을 앞두고 있었지만, 오히려 더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은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힘을 더해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눅 22:43).

주님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럴 때 하늘에서부터 감당할 힘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상황에 반응하는 자와 기도로 준비된 자

드디어 상황이 벌어집니다.

가룟 유다가 군사들을 이끌고, 예수님께서 늘 기도하시던 감람산으로 올라옵니다. 이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제자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눅 22:49-50).

 

갑작스러운 위협과 충격 앞에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미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감정대로 행동합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암이 커졌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분노와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앞에서 절망에 빠지고, 결국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원망하며 소리치기도 합니다. 마치 칼을 빼어든 제자들처럼, 고통에 반응하되 기도 없이 반응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가 안타깝게 읽은 암 관련 후기 중 하나는, 암에 걸린 가족간에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암 환자 본인도 고통스럽지만, 함께하는 가족들도 그 아픔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것입니다.

 

에반 핸들러의 “내 인생에 불이 났을 때”에 핸드러는 결국 백혈병에서 회복하지만 아픈 동안 내내 옆에서 뒷받침해주었던 여자친구 재키와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다. 에반과 재키가 결별하기로 하는 부분은 읽기에 고통스럽다…. 하지만 둘이 결별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아내와 나도 쉽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서 프랭크, 메이, 아픈 몸을 살다, EBOOK 377/421)

 

우리는 보호자라면 당연히 내 아픔을 다 이해해주고, 끝까지 함께해 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호자들도 이미 지쳐가고 있습니다. 내가 짊어진 고통도 너무 무거운데, 딸도, 남편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환자 당사자는 외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보호자들 역시 그 상황 속에서 상처받고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 지금 당신의 가족이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그들도 어느 순간 마음이 무너져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귀를 잘랐다’는 제자들의 행동과 같은 모습입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함께 무너져버리는 것이죠.

 

고난을 수용하시는 예수님

기도의 본을 보이시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눅 22:51).

삶에 닥쳐온 일을 수용하시되 심지어 자신을 잡으러 온 자를 치유하시기 까지 수용하십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가 무기력하게 넋을 놓고 고난을 없애 달라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아무리 기도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있음을 받아들여 가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야곱은 에서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그 시간이 다가오며 야곱은 지나가는 사람에게까지 자기를 축복하라고 씨름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 내 미래가 복이 되게 해달라 하십시오.

그 말 한마디를 왜 안하십니까?

야곱은 에서가 죽기를 바라고 없어지길 바랬겠지만,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만나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뜻 앞에 순복해 가는 길은 기도에서 일어나며 결국 순복의 길이 응답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 앞에서도 당당히 서신 예수님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눅 22:53).

 

이제 예수님은 잡혀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악의 권세가 본격적으로 역사할 시간이 되었고,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 두려운 순간 앞에 담대히 서 계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모두 흩어지고, 도망치고 맙니다.

 

기도로 고난을 이겨내십시오.

어려움은 우리 인생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려움에 무기력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뚫고 일어나 기도로 나아갑시다. 기도로 우리에게 불어닥치는 고난 뒤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붙들 수 있길 바랍니다.

 

◎ 묵상을 돕는 질문

1. 어려움이 찾아올 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상황의 무게에 눌려 무기력해져 있습니까?

 

2. 당신은 지금 삶의 어떤 상황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까?


눅 22:39-53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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