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13:1-13
죄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타 종교와 타협할 수 없는 기독교
기독교는 타 종교와의 타협이 불가능한 종교입니다. 종종 기독교, 불교, 카톨릭의 일부 지도자들이 매체에 나와 연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연합이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와 불교는 신에 대한 인식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카톨릭과도 연합할 수 없다고 봅니다. 과거 종교개혁에서 절대 병립할 수 없는 성상 숭배 문제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의식들이 난무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종교적 의식들, 미신적 행위들을 도입한 교황주의자들의 관행을 거부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신앙과 교리의 유일한 기준이라 하였습니다. 인간이 만든 전통이나 의식은 성경의 권위를 침해할 수 없으며, 성경은 교회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성경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과거 기독교와 카톨릭 간의 갈등은 정치적 이용으로 인해 종교전쟁으로까지 번졌습니다. 1618년에 시작된 30년 전쟁은 신성로마제국 내의 개신교 제후들과 카톨릭 황제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정치적 대립으로 확대되며 수많은 신앙인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이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종결되었으나, 이는 더 이상 피 흘리는 싸움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지, 종교적 타협을 체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피 흘리기까지 지켜낸 것은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리가 최우선이라는 사실입니다. 타종교와의 타협은 물론, 비슷해 보이는 가톨릭이나 심지어 같은 기독교 내에서조차 생각이 다른 점에 대해 조금의 타협도 없는 근본주의적 신앙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를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금송아지 제단에서 기도해도 응답해 주시지 않는가?
요아스의 제 이십 삼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왕하 13:1).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여호아하스도 여로보암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강하게 비판합니다(왕하 13:2). 여로보암의 죄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만연하게 한 페악한 일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정치적 목적으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백성들에게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또한 그는 레위인이 아닌 자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금송아지에게 제사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였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아람 왕국에게 지속적으로 고통을 받은 것도 이러한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람 왕국의 위협과 억압이 커지자 여호아하스는 결국 여호와께 간구합니다(왕하 13:4). 흥미로운 점은, 여호아하스가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금송아지 숭배가 행해지던 제단을 통해서 기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Matthew Henry의 주석에 따르면, 여호아하스의 기도는 진정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고 자비를 베푸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죄악을 넘어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하 13:5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향상을 만들면 안 되긴 하지만 여호와하스의 기도를 들으신 것을 보면 사람의 모습을 한 형태를 만들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은 괜찮지 않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은 성경에서 매우 엄격하게 강조되는 가르침입니다. 출애굽기 20:4-5에서 하나님은 명확하게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라고 명하셨으며, 이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시도가 금지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여호와하스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해서 어떤 형상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여호와하스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은 단순히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사건이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로마서 1:22-23에서 사도 바울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네발 가진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었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피조물의 제한된 형상으로 만드는 것이 곧 우상숭배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칼빈이 말했듯이,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을 피조물로 한정시키고 그분의 무한하심을 제한하는 행위입니다.
왕하 13:6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더라”
여전히 금송아지가 있는 상황에서 아세라 목상을 없앨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인간 마음은 우상 제조 공장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종교들의 형상을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상숭배를 해온 교황주의자들은 결국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온 “nostra aetate” 2항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방 종교들에 있는 무엇이든 참되고 거룩한 것은 그것을 존중합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들이 알고 있는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다가가려고 애쓰고 있으며, 가끔은 자신들의 무지 속에서 하느님을 더듬거리며 찾습니다."
또한 "Lumen Gentium" (교회 헌장) 16항에서도 카톨릭 교회는 이교도들과 타종교인들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언급합니다:
"하느님은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이런 경악할 말들을 주요 교리로 삼는 교황주의자들의 교회에서 성도가 박차고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말씀을 무지성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아는 바른 성도가 되어야 한다.
모든 신앙인은 성경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바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알고, 그것이 진리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행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무지성으로 신앙을 갖지 말고 바른 신앙에 대하여 스스로 연구하고 판단할 힘을 키워야 합니다.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처럼 세상의 죄악을 따르지 않는 저항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 예후가 여로보암의 죄를 따르는 것을 보고 그의 자녀들에게 차라리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살라고 하였습니다(렘 35:6-10). 예후와 함께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므로 여호나답은 큰 공을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는 예후가 여로보암의 죄를 따르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에 희망이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왕하 10:31-33 “31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32 이 때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서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시매 하사엘이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에서 공격하되 33요단 동쪽 길르앗 온 땅 곧 갓 사람과 르우벤 사람과 므낫세 사람의 땅 아르논 골짜기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과 바산까지 하였더라”
비록 여호아하스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겨우 생존할 수는 있었지만, 우상숭배가 지속되는 한 이스라엘 땅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왕하 13:7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하스의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 집에서 살게는 하였지만 “타작 마당의 티끌”과 같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아무 존재감도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것을 믿고 그 신앙을 따라 비록 불편할 지라도 차라리 광야에 나가 살게 된 레갑의 자손들은 오히려 성내에 사는 이들보다 훨씬 어려움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레갑의 자손이 재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죄를 답습하지 않을 수 있었던 말씀을 근거한 저항주의입니다.
근본주의적 교단과 교회에 속해 있더라도, 성도는 무조건적으로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교회의 타락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성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올바르게 서야 합니다. 기독교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말합니다. 이는 “항의하다” 또는 “반대하다”라는 의미인 라틴어 “protestari”에서 온 말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정신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앙 원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에 맞지 않을 경우 성도는 항의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자정(自淨)능력이 없어졌고 말합니다. 교회 지도자들 안에서는 자정능력이 본래 없습니다. 오직 말씀과 신앙에 각성된 성도들 안에서 정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 목사가 헌금을 사유화하거나 성적인 타락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강단에 서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깨어 있는 성도들 사이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깨어 있는 성도들이 그 교회를 떠나 버린다면 감히 그런 자들이 강단에서 발붙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신비주의적 행위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이단들이 강단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깨어 있는 성도들이라면 이를 바로잡을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기독교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습니다. 교황주의가 종교의 권위를 앞세워 성도들을 어둠 속에 두었던 시대를 깨고, 종교개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참된 진리를 되찾은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피 흘리는 저항을 통해 죽어가던 기독교를 다시 살려낸 것입니다.
깨어 있는 신앙
현대 교회의 죄악을 답습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을 통해 신앙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참된 기독교는 무지성적인 신앙이 아니라, 깨어 있는 신앙인들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해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바로 알고 그 말씀에 따라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타협'이라는 유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삶에서 성경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지 묵상해 보세요.
2. 오늘날 교회의 타락을 막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당신은 개인적으로 무엇을 개선하고 실천할 수 있을지, 말씀을 기준으로 고민해 보세요.
왕하 13:1-13
1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제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간 다스리며
2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3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더니
4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그들이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
5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6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더라
7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
8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9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0유다의 왕 요아스의 제삼십칠 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육 년간 다스리며
11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행하였더라
12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3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이 그 자리에 앉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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