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119:113-128
오직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종교란에 기독교를 쓴다는 것의 의미
요즘은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썼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묻는 질문란에 아무 망설임 없이 기독교인이라 적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대표하는 듯한 기독교인이라는 그 한 줄이, 과연 내 삶의 실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살아간다면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잠시 죄를 지은 것이라고,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까요?

시인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떠난 자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구원에 기독교 교리를 따져보려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든 인간적인 양심으로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라 말하면서도, 나라의 핵심 기술을 다른 나라에 넘긴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한국을 저버린 매국노라 부릅니다. 그가 국적을 적는 난에 한국이라 쓴 한 줄이 그의 정체성을 모두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과 행동은 따로 갈 수 없습니다. 삶이 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함과 은혜를 주심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시 119:113).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 말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린다하면서 정작 자신이 두마음을 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면 순종의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순종’은 병치 관계입니다. 병치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바라며 불순종을 삶의 길로 삼는 것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입소하신 분이 이틀만에 퇴소하게 되었습니다. 환우와의 첫 상담에서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저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식도암으로 수술도 하고 병원에 오래 있음으로 술을 마시지 않은지 2개월이 지났다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이 남자 분이 너무 걱정이 돼서 마침내 소중한 사람들에 입소하시길 바란 것입니다.
한참 이야기하며 다시는 술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다가 혹시 담배를 피우시냐고 물었습니다.
“네, 아까도 저기 냇가 가서 피웠는 걸요”
저는 너무 놀라 말씀드렸습니다.
“만일 담배를 끊지 않으시면 5년 이내에 인두암, 후두암, 폐암 발생 위험이 30-40%에 이릅니다. 담배 피실 때 거기 사진도 있지 않나요? 꼭 끊으셔야 합니다.”

“저는 담배는 못 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퇴소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낫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이 분 교회 지인이신 분이 담배 냄새가 많이 나냐고 묻는 것입니다.
“담배 냄새도 많이 나서 암환자들에게도 크게 피해가 되지만 무엇보다 나으려는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예수를 믿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인데 과거의 죄의 습관은 끊을 수 없다며 죄에 거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논리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죄인이지만,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실 은혜를 바라기에 더욱 죄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죄의 욕망을 떨쳐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과 같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안에 살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시 119:116-117).
시인은 주님의 말씀에 생명의 근거를 둡니다. 말씀 안에 거할 때에야 비로소 살아갈 길이 열리기에 간구합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라는 고백은 말씀 자체가 생명이요 능력이기에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말씀안에 살길이 있다는 것은 시인의 믿음이며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라며 시인은 주님의 약속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그 소망이 조롱거리가 되지 않기를, 주님께서 친히 그 소망을 이루어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길임을 알기에 담대히 요청합니다.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라고 다시 한번 간청합니다. 시인은 스스로 설 수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의 붙드심이 없다면, 그는 쉽게 넘어지고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말씀으로 붙들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면적인 신앙은 하나님이 무너뜨리신다.
시인은 주의 율례에서 떠난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주의 율례들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그들의 속임수는 허무함이니이다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시 119:118-119).
시인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인생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자를 하나님이 모두 멸하셨으니 살 길은 오직 말씀을 따르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보듯 우리 인생이 살 길은 오직 순종하는 삶밖에 없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삶이 복 있는 삶이 아닙니다. 악한 길, 죄인의 길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악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습니다. 그 어떤 어둠도, 어떤 거짓도 주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삶에서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살아온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고백하듯, 불순종의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아는 자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대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참된 경외심이 우리 안에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시 119:120).
주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말만하는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 말이 내게 특권이 되거나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해 놓고, 교회를 실족하게 하고, 형제를 넘어지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는 삶을 산다면, 주님께서 어찌 그것을 그대로 두시겠습니까?
주님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공의를 지키시기 위해, 필요하다면 나를 낮추실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게 한 죄로 인해, 아들을 잃는 하나님의 심판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왕이라 해서, 마음에 합한 자라 해서, 그가 지은 죄가 무시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죄를 드러내셨고, 그를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쳤습니다. 자신의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었습니다. 주님의 심판 앞에서 떨면서, 다시 말씀에 온전히 거할 수 있게 해달라 간청했습니다.
말씀을 가르쳐 주소서.
그리하여 시인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시 119:124-125).
이 기도는 말씀을 통한 삶의 방향,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을 잃어버린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말씀 없이 걸어가는 길이 결국은 멸망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 119:127).
정말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금보다 말씀을 더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종교란에는 기독교라 적으면서 마음은 물질에 전부 빼앗겨 버렸습니다. 삶의 가치관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중심이었다면 지금처럼 우리 사회가 이토록 정치적으로 나뉘고 흔들릴 수 있었겠습니까? 말씀이 삶의 중심이라면 더 이상 혼란과 분열, 거짓과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누가 더 많은 이익을 얻게 해줄 것인지, 누가 우리 삶을 더 편하게 해줄 것인지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들에 속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진심으로 백성들의 호주머니를 채워주지 않습니다. 기대하지 마십시오. 참된 복은 하나님의 가치가 살아 있는 나라가 되어야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살아 있는 백성이 있을 때, 나라가 삽니다. 말씀에 온 마음을 둔 사람들로부터 참된 변화가 시작됩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참 똑똑합니다. 성경도 아는 것이 많습니다. 세상의 것들도 아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의 복받는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합시다. 우리 안에 말씀을 향한 갈망이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으로 나라가 살아나게 하소서. 말씀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2. 당신은 지금 삶의 어느 부분에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시 119:113-128
113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14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115너희 행악자들이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리로다
116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117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118주의 율례들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그들의 속임수는 허무함이니이다
119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
120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
121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
122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123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124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125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126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127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128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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