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36-53 말씀을 통해 다시 뛰는 교회 - 매일성경, 큐티 / 한국 교회 부흥, 성령 충만
눅 24:36-53
말씀을 통해 다시 뛰는 교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막연하게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난다는 말을 어떤 의미인지 복잡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차라리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나셔서, ‘내가 여기 있다’고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인격적인 만남도 참 쉽게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종교 개혁가 루터의 전기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날, 루터가 기도하는 중에 눈앞에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루터는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는 말씀을 통해 만난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형상도 원하지 않는다.”
그 말을 하자, 예수님의 형상은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루터 전기의 고전 중 하나인 롤란드 베인턴(Roland H. Bainton)의 《Here I Stand: A Life of Martin Luther》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베인턴은 루터의 신학을 설명하면서 루터가 ‘말씀 외에는 어떤 것도 신앙의 근거로 삼지 않으려 했던 태도’를 강조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깊은 교제를 나누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그러했듯 말씀 속에서 우리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삶이 변화되어질 수 있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본 제자들의 반응
제자들이 모인 예루살렘에 엠마오로 가던 두제자가 다시 합세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입니다. 저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만났던 이야기를 합니다. 베드로도 빈 무덤을 보았던 일과 그곳에서 예수님을 뵈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짠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실제 현장에 나타나셨으니 이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눅 24:36).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접한 제자들의 반응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눅 24:37)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 9:22, 44-45, 18:31-33). 그리고 실제로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여인들, 베드로, 엠마오의 두제자가 부활하셨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눈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셨음에도 부활하셨다는 인식을 못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바로 인간 인식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컴퓨터를 예로 들어볼까요? 키보드에서 'A'를 치면 화면에는 'A'가 나와야 합니다. 컴퓨터는 입력된 값을 정확히 반영하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보고도 본 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들어도 들은 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이렇게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원죄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시 14:2).
그러나 바울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 3:11)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언은 모든 증인들이 이미 예언된 말씀을 믿음으로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보고 믿음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부활이 바르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말씀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귀를 열어주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부활의 증거와 증인의 삶
예수님은 이제 입을 열어 말씀이 어떻게 부활을 말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눅 24:44-46).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고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 말씀이 믿어지고 나서야 지금 눈앞에서 자기들과 식사도 하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깨닫게 하시는 일을 성령 시대부터는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에 복음이 세상에 미치게 될 것도 기록되어 있음을 말해 주십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7-48).
아마 누군가는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묻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연약한 ‘나’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결국 증인의 삶을 완수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약속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에 의심했고, 흔들렸고, 숨어 있던 자들이 바로 교회의 기반이 될 사도들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제자들이 증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의지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그 말씀을 믿은 부족하기 그지 없는 사도들이 믿음으로 부활의 증인들이 된 것입니다.
결국, 증인의 삶도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 안에서 이미 그렇게 되리라고 하신 바,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 중심의 선교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에 언더우드, 의사인 알렌, 그리고 아펜젤러선교사는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에 도착합니다. 미국에서 명문 교육을 받아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저들이 이 조선 땅에 들어온 것은 저들이 먼저는 예수께서 저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을 말씀을 통해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믿었기에 나아가 말씀을 통해 부활의 증인이 되기로 작정하고 이 조선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은 외국인에 대해서 극심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열강들이 군사력으로 문호를 개방시키고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님들의 열정과는 다르게 조선에서의 복음 전파는 큰 난관에 부딪힌 것입니다. 당시 선교적 어려움을 잘 드러내는 것이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문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이곳 조선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그저 경계와 의심과 천대가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서양 선교사님들이 믿음이 없이 어찌 이 무지한 백성이 가득한 땅에서 버티며 조선의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 전파 사역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의 경계심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우물이나 강에 생활하수나 배설물이 그대로 유입되어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등의 수인성 전염병이 빈번이 발생하였고 특히 서양 선교사님들의 가족들이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어린 자녀들은 그 목숨을 잃는 경우가 빈번하였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우리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국 만리에 오신 선교사님들이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가보면 1,2살 아이들 묘비가 많이 있습니다.
찰스 알렌 클라크, 곽안련 선교사님은 둘째 아들 버튼이 1904년 홍역으로 사망, 셋째 아들은 1905년 소화기 질환으로 생후 5개월 만에 사망했습니다.

관안련 선교사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분들이 있으니 언더우드 선교사 이후 1950년 한국 전쟁 발발까지 1000여명의 서양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와 주의 복음을 전했는데, 그 고난과 어려움을 어찌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은 19세기 후반 복음이 전해진 이래, 불과 한 세기도 채 되지 않아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없는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복음의 결실은 헌신적인 선교사들의 수고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가 말씀 중심의 부흥 속에서 성장해 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선교학에서는 한 지역의 선교가 성공하려면, 현지 교회가 자생력과 자립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그 모델이 된 사례입니다. 초기부터 한국 교회는 복음을 말씀을 통해 받아들였고 말씀을 중심으로 신앙을 뿌리내렸습니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회개와 갱신의 불씨가 되어, 은혜를 체험한 이들이 ‘권서(勸書)’로 헌신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권서인
그리고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말씀 중심의 사경회(성경연구 집회)에서 시작되어, 철저한 죄의 자백과 회개, 그리고 공동체적 회복으로 이어지며 조선 교회의 역사에 길이 남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앞으로 조선에 불어 닥칠 역경을 이겨내게 할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민족의 심장에 깊은 믿음을 남긴 하늘의 불이 땅에 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에 은혜를 받은 분들의 은혜는 개인의 구원을 넘어, 겨레의 구원으로 흘러갔습니다.
우리가 함께 자주 부르는 손양원 목사님의 찬양, “꽃이 피는 봄날에만(새찬송가 541장)”, 그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저 천국을 바라보니 이 세상은 나그네 길 죽음의길 피하라며 나의갈길 막지말라 내게맡긴 양을위해 나의겨레 평화위해 우리주님 가신길을 충성으로 따르리라”
이 가사 안에는 개인의 신앙을 넘어, 조국과 겨레를 향한 거룩한 헌신이 녹아 있습니다. 이 가사처럼,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도 임하기를 소망하며 자신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1907년 이후로 이어진 경술국치 이후, 1919년 3·1 만세운동은 이전에 성령의 역사로 깨어난 백성들의 내면에서 비롯된 외침이었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관이 아니라 민족의 양심이었고, 그 중심에는 말씀으로 무장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평양 부흥 이후 일어난 신앙의 깊이는 말씀 사경회를 통해 각 개인의 심령 속에 말씀이 씨앗으로 떨어져 민족의 고난의 시간을 지나며 더 굳건한 뿌리가 내려 큰 나무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서 자라난 굵은 줄기들이 한국 교회의 지도자가되었습니다.
1919년 3.1 운동의 기초가 되는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 대표중 기독교인 대표가 16명입니다.

기독교는 어둠 속에서 길을 비춘 촛불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말씀이 한국 교회를 다시 뛰게 하리라
그래서 말씀을 사모하는 당신이 지금 고난 속에 있을지라도 이겨내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끝까지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으로 살아내십시오.
물론 고난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당장 해결되길 바라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것은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씀을 붙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처럼 인간은 오류가 많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차곡차곡, 우리의 깊은 곳에까지 쌓여야 합니다. 단순히 머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골수에까지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뿌리가 되어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나무의 나이테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무를 잘라 보면 까만 부분이 있고, 그 옆에 하얀 부분이 이어지다가 다시 까만 부분이 나타납니다. 그 까만 부분이 바로 겨울을 지나며 자란 흔적입니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진통을 겪으며 살아낸 시간들이 나이테로 새겨지는 것이지요.
동남아의 나무들은 태풍에 쉽게 쓰러지지만, 한국의 나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친 바람과 변덕스러운 기후를 이겨내며 단단하게 자라난 나무들입니다. 거듭된 시련 속에서 견디며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견뎌냅시다. 그리고 말씀을 붙들고 한국 교회로 다시 돌아갑시다.
한국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하여 권능을 받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아가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탐욕과 자기 사랑이 가득하여 고통이 가득한 이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 대한민국을 다시 복음으로 뛰게 할 것입니다.
◎ 묵상을 돕는 질문
1.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습니까?
2.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어떤 힘을 쓰고 있습니까?
눅 24:36-53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50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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