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생명을 낳습니다
우리는 살고 싶어 합니다. 본능적으로 생명을 붙들려 합니다. 몸이 아프면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피곤하면 회복하려 애씁니다.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힘을 기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고자 하는 본능을 주지 않으셨다면, 누구도 이토록 치열하게 삶을 지탱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고자 하는 본능을 주지 않으셨다면, 누구도 이토록 치열하게 삶을 지탱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연약할 뿐 아니라 유한하다고 말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죽음은 저주이자 실패의 상징이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5장은 놀라운 반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티끌에서 왔고 먼지로 돌아갈 우리를 '사람'(아담)이라 부르시며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 5:1-2).
아담이라는 말은 아담 개인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흙과 티끌로부터 온 존재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닙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극대화하여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이나 재"라 불렀고, 욥은 병들고 지쳤을 때 "흙을 뭉치듯" 지어진 자신이 "다시 티끌로 돌아갈" 것을 탄식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자신을 낮추어 '소자', 혹은 '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연약한 우리의 처지를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요?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더 살고 싶어합니다. 내 인생에서 내가 다 이룰 수 없고, 내가 다 채울 수 없기에 우리는 나와 닮은 아이를 기뻐합니다. 창세기 5장은 죽음과 생명이 반복되는 기록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명에 대해 더욱 강하게 이끌립니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온 인간이 오히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더 치열하게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하나님의 축복인 생육의 강한 동인이 된 것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25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전쟁미망인 20만, 전쟁 고아 10만, 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했습니다. 그 이후 태어난 세대를 우리는 베이비붐 세대라 부릅니다. 잃어버림과 상실과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이 나라는 다시 많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인간은 아프면 낫고 싶고 슬프면 웃고 싶어지는 것처럼, 죽음은 생육의 동인이 되었습니다.
연약함이 예배를 낳습니다
우리에게 아무 어려움이 없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여러문제가 생기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에노스(Enosh)라는 이름은 '사람', '인류'라는 뜻으로, 특히 병들거나 마침내 죽게 되는 인간의 연약함을 확인시켜 주는 이름입니다. 셋의 시대에 사촌이 죽고, 병들고, 슬픔에 잠기는 일들이 서로에게 나눠지면서, 셋은 우리가 연약한 존재임을 신앙으로 고백하며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라 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는 "그때부터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합니다. 이것 또한 축복입니다.
끝이 있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오도 마르크바르트는 "생의 길고 짧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365년을 살았습니다. 다른 족장들에 비하면 훨씬 짧은 생애입니다. 그러나 그가 적게 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이 100살까지 이어질지, 80살에 마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삶의 핵심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인생을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노년기는 쇠퇴기가 아니라 인생을 통합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한 사람이 병상에 누워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을 때, 혹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을 때, 이는 생의 종료를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내 삶에 대해 기록된 말은 어쩌면 이 족보처럼 '몇 살까지 살다가 아이를 낳고 죽었다'가 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되게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더 복되게 기록될 수 있지 않을까요?
더 복된 인생이란 더 오래 산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한 삶입니다.
◎ 묵상을 돕는 질문
1. 먼 훗날 누군가 나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나요?
2. 우리 인간은 유한하며 연약하기에 병들거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오늘, 당신은 어떤 변화를 통해 하나님과 더욱 동행하며, 그분의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로 결단하시겠습니까?
창 5:1-32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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